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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을 비스듬히 기울여

양소정 개인전: In My Mold

2023.12.5-12.31 drawingRoom

 

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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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것을 비스듬히 기울여 놓으면 그 안에 공간이 보인다. 두께 없는 평면처럼 중립적인 자리를 지키던 것이 어떤 기울기를 갖게 되면 그 내부로부터 무언가를 반사시키며 공간의 속사정을 드러내곤 한다. 양소정의 그림은 이러한 공간과 연루되어 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보면, 평면과 임의의 공간 사이를 오가는 형태에 관해 환기시킨다. 대부분 “무제”로 이름 붙여진 그림들 가운데 “사물모양”이라는 괄호 안의 부제를 포함한 일련의 작업은, 평면과 임의의 공간을 규명하는 매개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실제 공간의 큰 벽을 지지체 삼아 사물의 모양을 재배열한 <폐곡선>(2023)은 이번 전시 《In My Mold》의 내막을 보다 구체화함으로써 “차원”에 관한 물음을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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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본 것에 대하여 어떻게 글을 시작할까 며칠을 궁리했다. 그보다 앞서,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실에 갔을 때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차가운 회색 공간을 그려놓은 캔버스와 마주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내내 맴돌았다. 평평한 화면에 빈틈없이 꽉 맞게 설계해 놓은 미지의 회색 공간은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진공상태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순간적으로 숨이 멎게 할 서늘함이 나의 피부인지 심장인지 눈인지 어떤 감각에 다가왔다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봉인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그는 며칠이 지나 이 그림의 제목이 “깨진 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물의 죽음”에 관한 기억에서 길어 올린 형상이라는 것을 내가 가늠할 수 있도록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저 적어 보냈다. 

   잠시 중단했던 이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펼친 그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임의의 형상들에 한참 열중해 있던 터였다. <폐곡선>은 그러한 관찰과 사유와 상상을 오가며 도달한 이미지로서, 앞서 말한 대로 평면과 임의의 공간을 매개하는 “폐곡선”에 관한 회화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나무 판의 얇은 두께를 가진 폐곡선의 형상들은 흰 벽 위에서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유동적인 이미지와 결합해 있다. 일제히 사방으로 튀어올라 퍼져나가는 물줄기 같아 보이는 착시를 걷어내면, 평평한 흰 벽 위에 여러 폐곡선의 실체들이 뒤엉켜 하나의 화면 안에서 제 방식대로 공간을 점유하는 일렁임을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들은, 언 강이 녹으면서 단단하고 견고했던 얼음이 다시 물이 될 때와 벗겨놓은 채소 껍질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제 무게와 부피를 잃어버린 채 임의적인 형태로 소멸해 가고 있을 때, 그리고 그가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림이 되지 못한 물감의 파편들이 벽과 바닥에 떨어져 어떤 얼룩들을 만들어 놓았을 때, 그 한시적인 순간들 속에서 이렇다 할 제 몫의 자리 없는 것들로 목격된다. 양소정은 그렇게 존재를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사건 속에 들어서 버린 형상들을 붙잡아 임의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로 회화의 명분을 꾀한다. 

   <깨진 물>(2023)은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캔버스 모서리에 꽉 차게 그린 어떤 회색 공간 내부에 대한 내밀한 목격자로서 우리를 그림 앞에 세워 놓는다. 게다가 저 공간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호하기만 한 폐곡선의 이미지들이 회화의 표면에서 방금 일어난 파열처럼 한순간에 시점을 변환시키기도 한다. 그는 고인 물이 죽었을 때 물이 깨졌다는 표현을 쓴다며, 금붕어를 키우던 어항에서 물이 깨지는 것을 목격했던 자신의 기억 위에 일련의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들을 교차시켰다. 투명하고 유동적인 물의 죽음과 그때의 파열은, 역설적이게도 소멸의 진행 과정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어떤 형상을 끈질기게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인간의 육체가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원형을 기억해내려는 추상적인 물질[몸, 뼈, 재, 흙]로의 변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깨진 물> 안의 저 회색 공간은 죽은 이의 육체를 위한 (변환의) 자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말했다. “몸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폐곡선”이라고. [*작가노트 “몸”, 2021.6.1.]

   사물 형태에 관한 드로잉 연구와 회화적 표현에 몰두해 온 긴 시간을 지나 <폐곡선>에 이른 양소정의 회화는,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말하자면 (소멸을 향해) 변환하는 형상들을 위한 자리로서 “회화의 평면”과 “회화적 공간”을 환기시킨다. <Untitled(사물모양)>(2019-2022) 연작에서, 그는 허공에 가까운 텅 빈 배경 위에 마른 식물, 연기, 천, 얼룩 등을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각각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에 주목하여, 그는 균일하게 칠해진 바탕 위에 부유하며 낙하하는 이 이중적인 움직임을 정지시켜 놓았다. 그가 아주 오래 전에 말한 대로, 그는 사물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에는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그것들이 제 형상을 드러내며 견디고 있는 한 순간을 집중하여 보고자 했다. 그것이 유동하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윤곽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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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무조각 드로잉이라고 부르면서 사물의 형태 대로 또렷하게 윤곽선을 오린 <Untitled(사물모양)>(2022-2023) 연작은, 폐곡선 안에서 훨씬 적극적인 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캔버스 평면 위에, 중력도 원근감도 없이 네 개의 모서리가 구축한 평평한 회화의 공간 속에, 양소정은 천, 끈, 불, 연기, 그을음, 마른 식물, 뼈, 뿔, 가죽, 머리카락, 유리, 물 같이 허무하고 무기력한 사물의 모양을 화석처럼 박제하듯 꼼꼼하게 새겼다. 그래, 그의 그림은 (무모한) “새김”에 가깝다. 회화의 평면에 자리잡은 (사라져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이 비로소 제 윤곽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선을 도려내 다시 현실의 공간 속에 떨어뜨려 놓고 스스로 제 변환의 자리를 탐색하는 수행의 과정을 감행한다. 

   <폐곡선>에서는, 일련의 변환을 기꺼이 감수해온 형태의 윤곽선들이 단단한 벽을 끈질기게 기울였다 일으켰다를 반복하며 회화적 공간을 구축/구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낱장의 종이 위에 정교하게 그린 사물 모양의 드로잉을 가위로 오려서 삼차원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평평한 벽을 지지체 삼아 제 윤곽을 온전히 드러냈던 기존 작업 방식에서, 윤곽선을 따라 오려낸 드로잉 자체에 나무 지지체를 결합한 작업이 “나무조각 드로잉”이다. 종이에 그린 사물의 형태를 오리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던 평면에서 입체로의 미세한 변환의 감각을, 그는 나무 판재 두께만큼의 양감과 무게와 부피를 동원시켜 현실에서 회화적 공간을 탐구하는 맹목적인 시간을 보내오면서, 다시 입체에서 평면으로 고정되는 회화의 자리로 되돌린다. 

   나란히 놓인 한 쌍의 <Untitled>(2022)는 세로의 길이가 2미터에 가까운 큰 그림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사물의 풍경을 포착한 것처럼 화면 바깥의 영역으로 연장되는 형태의 윤곽들은 매우 정교하고 긴밀하게 엮여 수직적인 힘을 드러낸다. 이 수직의 힘은,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물의 모양을 폐곡선의 윤곽으로 포착한 각각의 형상들이 텅 빈 허공에서 제 자리를 살펴온 지난한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부유하는 것과 하강하는 것 사이의 순간적인 긴장이 만들어내는 잠재적인 사물의 풍경이다. <폭발>(2023) 또한 정지된 장면 안에 응축되어 있는 물리적인 힘을 가시화 하는데, 허공으로 흩어지는 폭발의 잔해물이 중력으로 모아지려는 충동과 엮여 지극히 추상적인 회화의 평면을 구축해 놓는다. 

   양소정은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에 맹목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변환을 자처하는 형상에게 꿈틀거리는 윤곽선을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잠시 정지시켜 놓을 유예의 자리로서 허공/진공과도 같은 회화의 평면을 지지체로 삼는다. 그리하여, (불완전한) 우리의 두 눈이 어떤 원형에 대해 기억해낼 수 있는 “보기”를 지속할 수 있도록 형태의 윤곽을 매만진다. <깨진 물>처럼 그 가시성이 존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듯이, 양소정의 회화에서는 무생물의 사물이 예외적인 죽음의 표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유령의 형상에 대한 (한시적인) 응시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그는 사물의 모양을 꼼꼼하게 살피며 그 형태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왔는데, 유독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흡수하면서 반사하는 사물”로서 “진주”에 관한 짧은 노트를 써놓은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사물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다. [*작가노트 “진주”, 2021.4.14.] 사라지는 과정 중에 있는 형상이란, 그것의 죽음, 그러니까 그것과 닮은 임의의 흔적들을 현실에 남겨놓고 추상적인 물질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흡수하면서 반사하는 진주의 폐곡선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형태(形態) 양소정 개인전 전시서문 

사이아트 스페이스 2017. 12. 19 - 12.24

내면 세계의 형태를 본다는 것 혹은 알아간다는 것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의 형태를 식별함으로써 그 사물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때 시각적 감각은 이전에 경험된 감각 정보나 동시에 감각되는 다른 감각 정보와 비교하고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가를 지각하고 인지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의 형태를 보는 행위는 세계를 알아가고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마음이나 생각과 같은 비형상적 세계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을 보거나 보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 역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주 이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이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것들을 가시적인 것들과 연결 짓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주로 상징이나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마음이나 생각이 형체가 없는 것이기에 이와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연결 짓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양소정 작가는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가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에 집중하게 된 것은 인간이 언어적 학습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원초적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유 방식은 시각적 경험으로부터 온 이미지가 그 기초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내부에서 떠오르는 심상이 언어로 번안되는 과정에는 의미의 왜곡이나 손실이 클 수 밖에 없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작업노트에서 ‘언어를 믿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하였으며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을 알고 싶다’고도 하였다. 이는 작가 자신이 그의 내면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 드러낼 때 언어를 기반으로 한 의식에서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까지 알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가운데 작업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이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그의 내면에서 떠오는 세계를 형상화 함으로써 다시 그가 표현해 낸 작업을 통해 이를 관조적으로 바라보는가운데 더 깊이 알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그려낸 이미지들은 인간의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고, 나뭇가지나 신경세포 같은 동식물의 일부분 혹은 생체 기관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으며, 낚시 바늘이나 꼬챙이처럼 상징성이 강한 물체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 보이는 것들은 통일된 어떤 실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사물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여러 개체들이 서로 연결되고 조합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가 작업한 화면들은 대부분 배경이 소거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를 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양소정 작가 작업에서는 어떤 사물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사물 전체를 그리지 않았고 또한 배경이 되는 공간을 최대로 소거하거나 억제하여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맥락이 잘 파악되지 않도록 하였다. 부분부분 파편화된 요소들을 발견해가며 그 연결 방식으로부터 이미지 읽기를 해야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다만 화면 전체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형태와 색채 속에 동시에 아주 날카로운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섞여 있다는 점은 강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이때 양소정 작가가 이처럼 최대한 사물이나 형태의 맥락을 배제하고 그 사물에 포함된 일부 요소들과 그 관계만이 드러나도록 한 것은 기존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오히려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물이 갖고 있는 일부 속성들에서는 자신의 내면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요소들이 관계하는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그려내게 되는 회화적 작업 방식과 그 행위 속에서 작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길을 찾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 태도는 작가가 포착하고자 한 것이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일부 요소들이 모인 합(合)으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그 내면 세계를 구성하는 구조로서의 전체를 읽어가기 위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작업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작가 자신이 경험한 사건들이나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양소정 작가는 작업에서 마음과 생각의 편린들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자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그것들의 관계망을 그려내거나 재맥락화 된 상황을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복잡 다단한 그의 내면 세계를 구성한 타자들의 총합을 넘어선 그 어떤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작업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가시적인 자신의 내면 형태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그려가기를 시도하고 다시 그것을 더 깊이 읽어낼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Who am I , Who You are

Gallery Loft_H 2009. 04. 16 - 05. 16

심연 속에서 길어낸 우호적이고 잔혹한 이미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나는 어떻게 거머쥘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 경험하고 실감할 수 있는가. 나는 나인가. 그런데 그 나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몸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몸일 수는 없다. 몸은 존재가 거하는 집이며, 따라서 진정한 나란 존재며 관념이 아닌가(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구별한다). 그런데 그 관념은 나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의 관념이란 사실은 타자로부터 건너온 것, 이를테면 관습과 환경의 부산물이다. 해서, 나는 타자다. 나는 타자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상호영향사의 부산물이다. 상식과 합리, 선입견과 편견, 이념과 신념이 타자의 외연을 형성한다면,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 몽상과 환상, 그리고 존재론적 상처가 그 내연에 포진한다.

그런가하면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에다가 비유한다. 몸 역시 존재의 집이다. 언어와 몸의 이런 상동성에 근거해 유추해 보건데 그 언어는 사실은 몸의 언어며 무의식의 언어다. 몸은 곧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의 집이기도 한 것이다. 몸은 표정으로써 말을 하는데, 그 발화형식은 보통 언어의 발화형식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대개는 잠재돼 있거나 억압돼 있어서 바깥으로 잘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해서, 자크 라캉은 나는 나의 말 속에 들어 있지 않으며, 언제나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로 분리된다.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는 서로 부합하기도 하고 상충하기도 한다.

양소정의 그림은 이런 존재론적 자의식에서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캐묻고 추적해가는 그 과정에서 나는 무의식적이고 잠재의식적인 층위에 은폐되어져 있는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 존재는 꿈과 판타지가 열어 보이는 어떤 의외의 비전과 더불어 암시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기억이 복원해낸 온갖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불완전한 조합임이 밝혀진다. 이를 통해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한 전형을 예시해준다.

 

양소정의 모든 그림에는 검은 평면의 실루엣 형상이 등장한다. 판화의 스텐실 기법을 도입해 찍어낸 이 이미지는 텅 빈 배경화면과 함께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성을 강화해준다. 유기체처럼 흐르는 그 형상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응집돼 있다가, 이후 근작으로 오면서는 점차 그 흐르는 강도가 강해져서 분절되고 해체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 실루엣은 무엇인가. 작가의 무의식이다. 실루엣이 온통 검은 것은 무의식이 비록 작가 자신에게 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자기소외?). 그 언어는 침묵 속에 잠겨져 있다. 미처 발화되지 못한, 언어화되지 못한 말의 씨알들이 잠겨진 늪 같고 꿈같고 잠 같다. 의식의 지향호(작가의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 쟁여져 있는 일종의 의식의 창고 같은)이며 기억의 섬이기도 한 그 실루엣 속으로 작가는 빠져든다. 작가는 그 경험을 <무한 속으로 빠져 든다>고 한다. 이렇게 실루엣 속으로 팔이 잠긴다. 심지어 작가는 무슨 방이나 되는 양 신발까지 가지런히 벗어 놓은 채 실루엣 속으로 잠수한다.

무한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의 인식구조는 유한한 세계에 맞춰져 있다(관성?). 해서, 무한 속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인식구조가 지각변동과 함께 변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유한한 세계질서가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이 우연하게 만나지고,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물의 전치를 통해 예기치 못한 새로운 비전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매트리스 위의 분절된 신체와 무슨 고대 석상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잉크병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대의 우연한 만남과 같은 초현실주의의 비전이 열리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은 온갖 형태의 이질적인 사물들 간의 우연한 조합이나 새로운 관계형성 그리고 그것이 열어 보이는 예기치 못한 비전은 다 이런 사물의 전치가 다변화된 것이다.

사물의 이런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결합과 함께 무한한 세계가 열어 보이는 또 다른 비전으로는 변태를 들 수 있다. 스탠드 갓이 꽃잎으로 변태되고, 새장의 창살이 뼈로 변형되는가 하면, 화분 같기도 하고 목둘레 장식 같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캡 같기도 한 온갖 이질적인 형태들이 그 경계를 허물어 삼투된다. 사물간의 새로운 관계나 하나의 사물로부터 다른 사물로의 자유로운 이행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떠올리게 하며, 연상 작용에 바탕을 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서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매트리스 사이로 흘러넘치는 무슨 심연 같기도 한 무의식은 그 비전이 다름 아닌 잠이나 꿈과 연동된 것임을 말해준다. 잠은 인간의 의식이 이완되는 순간이며, 그 느슨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꿈은 비록 불완전한 기억으로 인해 그대로를 복원하거나 재생할 수는 없지만(일종의 심리적인 검열 장치가 복원과 재생을 방해하기도 한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비전으로써 그 자체 자족적인 또 다른 한 현실을 열어 놓는다(시뮬라시옹의 원전 격에 해당하는 장자몽 즉 나비와 장자가 서로 헷갈리는 경험은 이런 비전과 무관하지가 않다).

검은 실루엣 형상과 함께, 명상에 잠긴 듯 눈이 감겨진 두상(오일스틱에 의한 표면질감이 붓으로 그린 다른 이미지들과 대비되는)이나 새장 역시 무의식을 암시한다. 여기서 감긴 눈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외부가 아닌, 내면의 무의식을 향한다. 그 머리는 무슨 생각의 나무나 되는 것처럼 그 아래로는 뿌리를 드리우고, 위쪽으로는 생각의 다발들을 풀어낸다. 그림에 보이는 형상들은 말하자면 그 머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여러 이질적인 생각의 편린들인 것이다. 그 생각의 조각들이 때로는 식물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고, 더러는 분절된 신체나 뼈 그리고 장기와 같은 신체 이미지를 닮았다. 이와 함께 일종의 나무가 변형된 사슴 뿔 형상이 주체의 이상을 암시한다. 나아가 이런 유기적 이미지가 스탠드나 유리장식 등 각종 레디메이드와 같은 무기적 형상과 결합하며, 상호 변태되고 이행한다. 그리고 새장은 자기정체성과 연동된 대표적인 메타포로서, 특히 무의식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즉 새장은 외부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가두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와 동떨어져 자기 속에 안주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고립과 격리와 소외만큼은 피하고 싶은 마음을 표상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근작에선 일종의 잠재적인 폭력성이 감지된다. 조각들로 분절된 신체나 단면을 드러내며 잘려진 다리들, 그리고 모르긴 해도 그 신체를 잘랐을 칼들, 무슨 짐승의 이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유기적 형상이 내면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암시해준다. 무의식은 잠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꿈처럼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도 하지만, 때론 이처럼 잔혹한 본성과 맞닥트리게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 자체는 결코 살벌하지가 않다. 파스텔 색조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색감과 질감이 이 본성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양소정이 그린 이 일련의 그림들은 흡사 작가 자신의 꿈을 보는 것 같다. 그 꿈이 더러는 악몽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이면의 색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하고 맑은 색감으로 부드럽게 감싼다(작가는 이 색감을 위해 엷은 물감을 여러 번에 걸쳐 수차례 덧바른다). 이로써 기꺼이 꿈과 무의식, 심연과 무한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On Paintings of YANG, So-Jeong

Who am I , Who You are 

Gallery Loft_H 2009. 04. 16 - 05. 16

 

Friendly, Yet Cruel Images Grown in an Abyss

 

KHO, Chung-Hwan (Art Critic)

 

 

How can one fully grasp an entity called, I, Self, the subject or Ego. In what way can one experience and feel the existence of Self. In other words, am I who I am, or what I am? The question, however, lead to a more fundamental question: What it means by being who I am or what I am. Does I refer to a tangible body, or is it an ideological entity? At least one may surely assert that a body only cannot be I, because the body is the house of an existence. Then again, does it mean that I in true sense is both an existence and ideological entity (Heidegger differentiate existence and being or being itself)? If so, is the ideality induced from oneself? The answer the question is clear. The ideality is not induced from oneself. It is from Others. It is a by-product of customs, environment and so forth. Accordingly, I am an Other. I am a sort of a by-product of the inter-action and inter-influence between me and Others. While commonsense and rationality, preconception and prejudice, and ideology and faith forms the outer surface of Others, oppressed desire and unconsciousness, daydream and fantasy, and ontological scar lie under the surface.

Heidegger also says that language is the house of existence. And as aforesaid, a body also is the house of existence. Based on the similarity of a body and language, one can safely assume that language refers to the language of body and the language of unconsciousness. A body is the house of the existence and at the same time, it is the house of language. A body speaks via expressions and the way of speech is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language, and in many cases, the difference way of speech is hidden or oppressed so that it is difficult to be exposed. That is why Lacan put forth "I am not in what I say and I always say more than what I say." It means that unconsciousness also says while consciousness does. Here, I is divided into two: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The former and the latter sometimes correspond with each other and conflict in other times.

Such an ontological self-consciousness is the beginnig of the paintings of Yang, So-Jeong. In the process of seeking and tracing who I am, it is found that I is the hidden existence which lies on the level of unconsciousness or underconsciousness, and that the existence is suggested with an unexpected vision created based on dream and fantasy. But most of all, what is found in the process is incomplete combination of all kinds of heterogeneous images reconstructed by incomplete memories. With her works, one may witness a typical self-reflexive tendency.

In most of Yang's paintings, we can see black, silhouette-like image. The stenciled images, in line with empty background, seems to emphasise that the paintings are two-dimensional. The floating images in her early works were more cohered but they have been spreaded more and more, and now they tend to be segmented and deconstructed. What are the silhouettes? They are the unconsciousness of the artist. They are all black because although the unconsciousness is the artist's, it is unknown entity whose substance is not yet clarified (self-alienation). The language still is in a slumber. The seed of speech, not yet spoken and enunciated is somewhat like a deep swamp, or dream or sleep. Yang, in her works, falls into the silhouettes, the oriented call (the warehouse of consciousness where her ideological and sensuous experiences are stored), and an the island of memory. Yang remarks the experience as "falling into the infinity." She even takes off her shoes orderly and sinks into the silhouettes as if she is entering into a room

What then does it mean by "falling into the infinity?" A human-being can basically recognises the world of limitedness. That's why "falling into the infinity" means that the recognition structure is drastically transformed, and the order of the finite world is dissembled and restructured. It again means that the world is rearranged arbitrarily and voluntarily. In the process, heterogeneous things encounter one another and new relationships among them are created. Transpositions of things opens a new and unexpected vision, and a new world begins. Segmented body parts lying on a mattress suddenly meet with an ink bottle looks like an ancient sculpture. A surrealistic vision such as an encounter of a sewing machine on an operating table and umbrella ribs begins. All types of heterogeneous and contingent combinations, new relationships and the unforeseen visions shown in her paintings are nothing but diversification of transposition of things.

Another vision that such combinations open is metamorphosis. A lampshade becomes petals and cross-ribs of bird cage are transformed into bones. The division of things are expired and all kinds of heterogenous forms which look somewhat like a vase or neck ornaments or ice cream cap are infiltrated one another. The new relationships of things and free transformation of things remind of the current of consciousness by Marcel Proust, and they initiate an endless epic based on image association.

On the other hand, the abyss-like unconsciousness overflowing between mattresses depicts that the vision is related to sleep or dream. Human consciousness is relaxed while sleeping and what splits open the break is nothing but a dream. As a dream is incomplete memory, it can not be replayed or restored as it is (sometimes, a sort of psychological censoring devices hinder the restoration and replay), however it paves the way to a new and self-sufficient reality via the vision even more lively than the reality (It is somewhat connected to the dream of Zhuangz - the confusion between Zhuangzi himself and a butterfly - which corresponds to the original of simulation).

A head on a black silhouette which looks like meditating (The head was painted with an oil stick so that it shows different texture compared to the other images in the painting, painted with brushes), or a bird cage also supposes the unconsciousness. The closed eyes, of course, is heading towards not the outer world, but the unconsciousness. The head, as if it is a tree of thoughts, is stretching its roots downward, while a bunch of thoughts is growing on top of the head. The objects in the painting are the parts of heterogeneous thoughts sprouting out from the head. the pieces of thoughts look alike some sort of plants or fragmented body parts or bones or organs. The shape of an antler, transformation of a tree, indicates the ideal of the subject. Furthermore, such organic objects and diverse inorganic things are combined and transformed with one another. Here, a bird cage is a typical metaphor of identity which suggests duality of unconsciousness. In other words, a bird cage protects oneself from the outside world, at the same time it locks one in. With the representation, Yang shows the contradiction that one wants to be separated from the world, at the same time one wants to avoid being alienated and isolated.

In her recent paintings, one can find potential violence. Incised legs and body parts with their sections shown bluntly, knives which must be used for incision although they are not shown, and organic images which seem to hide the fangs suggests violence and aggression hidden inside. Unconsciousness is sweet like a deep sleep and enables you to fall into a dreamy world, however it sometimes lead you to see such a cruel instinct inside yourself. Irrespective that what they show are nothing but a brutal instinct, her paintings are not bloody, because smooth, pastel-like colour tones and textures of her paintings softly covers and neutralises such a brutality.

The series of Yang's paintings seem like representations of her dreams. The dreams can also be nightmares, but transparent and clear colour tones employed in her paintings softly cover even the nightmares (For the colour effects, Yang constantly recoats light colours over and over.) With the softened images, Yang leads us to voluntarily fall into her dream, her unconsciousness, and the abyss and the 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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